글로벌 인공지능(AI) 시장의 주도권 싸움이 칩 제조 분야로 빠르게 확산되는 가운데, 국내 반도체 거인 삼성전자가 새로운 기회와 위기를 동시에 맞이하고 있습니다. 생성형 AI 시장의 개막을 알린 오픈AI(OpenAI)와의 맞춤형 반도체(커스텀 SoC) 선행개발 협력이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사이, 또 다른 AI 거물인 앤트로픽(Anthropic)이 차세대 핵심 파트너로 급부상했기 때문입니다. 업계에서는 적자 탈출과 글로벌 시장 점유율 확대를 노리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에 이번 국면이 판도를 뒤집을 결정적 승부처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최근 업계 내부 소식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Arm 아키텍처 기반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하여 오픈AI 전용 추론용 NPU(dNPU) 선행개발을 심도 있게 진행해 왔습니다. 초기 단계에서는 양사 간의 긴밀한 조율 속에 상당한 기술적 진척을 이뤄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하지만 본 계약을 목전에 두고 최근 양사 간의 세부적인 전략적 이견이 발생하면서 개발 일정이 사실상 답보 상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인공지능 칩 자체 수급을 원하는 글로벌 테크 기업들의 요구 조건을 완벽히 충족시키는 과정에서 가격, 설계 방식, 혹은 공급 규모 등에서 조율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대형 AI 로직 고객사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가장 묵직한 카드 하나가 일시적으로 멈춰 서게 된 셈입니다.
오픈AI와의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정황 속에서, 시장의 시선은 앤트로픽의 행보로 급격히 쏠리고 있습니다. 앤트로픽은 최근 진행된 시리즈H 투자 라운드에서 무려 6500억 달러의 자금을 성공적으로 유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번 투자 이후 앤트로픽의 기업가치는 9650억 달러, 우리 돈으로 약 1440조 원이라는 가공할 만한 수준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주목할 점은 이 거대한 투자 라운드에 글로벌 메모리 시장을 삼분하고 있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전략적 인프라 파트너’로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앤트로픽이 공식 발표문에서 이들 3사와의 협력 분야를 ‘메모리, 스토리지’에 국한하지 않고 ‘로직 칩(Logic Chip)’까지 명시한 대목은 반도체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투자 참여국 중 SK하이닉스와 마이크론은 자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라인을 운영하지 않는 순수 메모리 기업입니다. 따라서 앤트로픽이 언급한 ‘로직 칩’ 협력 파트너는 사실상 맞춤형 칩 제조 능력을 갖춘 삼성전자 파운드리를 직접 겨냥한 메시지라는 것이 지배적인 해석입니다. 이는 단순한 메모리 반도체 공급 계약을 넘어 앤트로픽의 자체 AI 칩을 삼성의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에서 생산할 수 있다는 강력한 신호로 받아들여집니다.
앤트로픽은 그동안 자사의 초거대 AI 모델인 ‘클로드(Claude)’를 훈련하고 서비스하기 위해 아마존웹서비스(AWS)의 트레이니움, 구글의 TPU, 그리고 엔비디아의 GPU 등 외부 칩 생태계에 전적으로 의존해 왔습니다. 그러나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클로드 사용량과 연산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자체 칩 내재화가 필수적이라고 판단, 올해 초 브로드컴과 대규모 커스텀 칩 개발 계약을 체결하는 등 독자 노선을 모색해 왔습니다.
현재 앤트로픽의 자체 칩 설계 및 개발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어, 이를 신속하고 안정적으로 양산해 줄 수 있는 대형 파운드리 파트너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입니다. 엔비디아 독점 구조를 깨고 비용을 절감해야 하는 앤트로픽과, 대형 고객사 유치가 절실한 삼성전자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대목입니다.
물론 반도체 시장의 생리상 선행개발이나 파트너십 구축이 100% 최종 본 계약 및 양산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오픈AI의 사례처럼 최종 단계에서 조율이 어긋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시장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는 이미 전사적인 역량을 맞춤형 칩 시장에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지난해 말 시스템LSI 사업부 내에 ‘커스텀 SoC’ 전담 조직을 전격 신설하고 모바일 SoC 설계 분야의 베테랑인 박봉일 부사장을 선행개발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약 70여 명의 정예 엔지니어로 구성된 이 조직은 고객사가 원하는 요구사항에 맞춰 칩을 최적화 설계하는 고도의 역량을 다져온 만큼, 앤트로픽과의 기술 조율에도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마쳤습니다.
현재 글로벌 파운드리 시장에서 1위 TSMC(67.6%)와 삼성전자(7.7%)의 점유율 격차는 약 60%포인트에 달합니다. 격차를 좁히고 파운드리 사업부의 흑자 전환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테슬라의 차세대 AI 칩(AI5·AI6) 수주나 그록(Groq)의 추론 칩 생산을 넘어, 시장을 리드하는 양대 AI 거두(오픈AI, 앤트로픽) 중 최소 한 곳 이상의 메인 칩을 반드시 수주해야 합니다.
오픈AI와의 협상 테이블을 다시 가동 시키느냐, 혹은 1440조 몸값의 앤트로픽을 새로운 핵심 고객으로 완전히 확보하느냐에 따라 향후 글로벌 AI 반도체 시장의 권력 지형과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미래가 결정될 전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