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을 약속 잡으려면 몇 개의 앱을 거쳐야 할까요. 메시지 앱으로 연락하고, 지도 앱으로 장소를 찾고, 우버로 이동을 예약하고, 캘린더에 일정을 추가합니다. 최소 4개 앱을 오가는 이 과정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낫씽(Nothing)의 공동 창업자이자 CEO 칼 페이는 이 모든 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2026년 3월 18일 SXSW 컨퍼런스에서 그가 던진 메시지는 명확했습니다. “앱은 사라질 것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앱은 사라진다” — 도발적 선언의 배경
칼 페이는 스마트폰 산업의 이단아입니다. 원플러스(OnePlus) 공동 창업자 출신으로 낫씽을 설립해 반투명 디자인의 독특한 스마트폰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타이거 글로벌이 주도하는 2억 달러 규모의 시리즈 C 투자를 유치하면서 낫씽이 ‘AI 퍼스트 디바이스’를 개발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고, 이번 SXSW 발언은 그 비전의 구체적인 윤곽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가 앱의 소멸을 예고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스마트폰 인터페이스가 20년째 바뀌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잠금 화면, 홈 화면, 앱, 앱스토어. 2007년 아이폰이 등장하기 전 팜 파일럿(Palm Pilot)이나 PDA 시절과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입니다. 그는 “사용자 경험 측면에서 20년 동안 실질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기술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우리가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은 멈춰 있다는 것입니다. 이 괴리가 칼 페이를 자극합니다.
AI 에이전트가 앱을 대체하는 3단계 시나리오
칼 페이는 AI가 앱을 대체하는 과정을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단계는 현재 일부 기업들이 실험 중인 수준입니다. AI가 사용자를 대신해 항공권을 예약하거나 호텔을 잡는 것처럼, 명령을 받으면 특정 작업을 실행하는 AI입니다. 칼 페이는 이 단계를 “솔직히 말해서 지루하다”고 표현했습니다. ChatGPT의 우버·도어대시 연동, 구글 AI 모드의 쇼핑 기능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유용하지만 혁명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가 훨씬 흥미롭습니다. AI가 사용자의 장기적인 의도를 학습하기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단순히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달성하려는 목표를 이해하고 그에 맞는 제안을 먼저 해줍니다. 더 건강해지고 싶다는 의도를 AI가 파악하면, 명령 없이도 관련 행동을 유도하는 알림을 보내는 식입니다.
세 번째 단계가 칼 페이가 진짜 목표로 삼는 미래입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것을 본인도 모르는데, AI가 먼저 알아채고 실행하는 단계입니다. 그는 “시스템이 우리를 너무 잘 알게 되면, 우리가 원하는지도 몰랐던 것들을 먼저 제안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ChatGPT의 메모리 기능과 비슷한 개념이지만, 훨씬 더 깊고 선제적인 수준입니다.
커피 약속 하나로 설명하는 스마트폰의 문제
칼 페이가 현재 스마트폰의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겠다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도를 실행하려면 메시지 앱, 지도 앱, 우버, 캘린더 앱을 차례로 열고, 각각의 앱에서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단순히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4개의 앱을 거쳐야 합니다.”
AI 퍼스트 스마트폰에서는 이 과정이 사라집니다. “나는 당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당신의 의도를 파악하면 그냥 알아서 해줄 것입니다.” 앱을 하나하나 열고, 화면을 넘기고, 버튼을 누르는 과정 자체가 AI 에이전트로 대체됩니다.
핵심 통찰 — AI를 위한 인터페이스를 설계해야 한다
칼 페이의 발언에서 가장 날카로운 통찰이 담긴 부분은 인터페이스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 AI 에이전트들은 기존 스마트폰의 인터페이스를 ‘흉내’ 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사람이 화면을 터치하고 메뉴를 탐색하는 방식을 AI가 따라 하는 것입니다. 이 방식은 비효율적입니다.
칼 페이는 “AI 에이전트가 인간용 인터페이스를 사용하게 하는 것이 미래가 아닙니다”라고 강조합니다. 진정한 미래는 AI 에이전트가 직접 사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처음부터 새롭게 설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위한 화면이 아니라, AI가 데이터를 직접 주고받고 실행할 수 있는 API와 백엔드 구조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낫씽은 이미 이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현재 낫씽의 자체 운영체제는 사용자가 바이브 코딩으로 미니 앱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합니다. 단기적으로는 앱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겠지만, 궁극적으로는 AI 에이전트가 마찰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로의 전환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입니다.
스타트업 창업자들에게 던지는 경고
칼 페이의 발언은 현재 앱을 개발하고 있는 스타트업들에게 직접적인 경고이기도 합니다. “창업자이거나 스타트업이고 앱이 핵심 가치를 담은 곳이라면, 그것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파괴될 것입니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 수 있지만, 이미 조짐은 보입니다. ChatGPT는 스포티파이, 우버, 도어대시와 직접 연동되어 사용자가 앱을 열지 않아도 해당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구글 AI 모드는 검색 결과 대신 AI가 직접 답변하고 예약까지 처리합니다. 앱으로 가던 트래픽이 AI 인터페이스로 이동하기 시작하면, 앱의 존재 이유가 흔들립니다.
얼마나 현실적인가 — 낙관론과 현실 사이
칼 페이의 비전이 완전히 실현되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습니다. AI가 개인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고 오류 없이 실행하려면 현재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정확성이 필요합니다. 개인정보 보호와 데이터 접근 권한을 둘러싼 규제 문제도 있습니다. AI가 모든 앱을 대체하면 애플과 구글이 장악한 앱스토어 생태계가 어떻게 재편될지도 큰 변수입니다.
칼 페이 본인도 이것이 단기적으로 일어날 일은 아니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방향성 자체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그의 확신입니다. 20년간 변하지 않은 스마트폰 패러다임이 AI에 의해 마침내 재편되는 시점이 생각보다 빠르게 올 수 있다고 그는 믿습니다.
결론 — 앱 시대의 황혼이 시작됐다
잠금 화면, 홈 화면, 앱 아이콘, 앱스토어. 2007년 이후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온 이 스마트폰의 문법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AI 에이전트가 사용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앱 없이 직접 실행하는 세계로의 전환이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칼 페이의 선언이 현실이 되는 속도는 결국 AI 기술의 성숙도와 사용자의 신뢰 수준이 결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앱을 열고 화면을 넘기고 버튼을 누르는’ 시대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