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진짜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일까?” 중력과 정보 엔트로피로 우주를 해석하는 최신 가설

“우주는 진짜가 아니라 시뮬레이션일까?” 중력과 정보 엔트로피로 우주를 해석하는 최신 가설

시뮬레이션 가설과 ‘정보’로 보는 우주

플라톤의 동굴 비유부터 영화 매트릭스까지, “우리가 보는 현실이 진짜냐, 누군가 만든 시뮬레이션이냐”는 질문은 오래된 철학적 주제입니다. 2003년 옥스퍼드의 닉 보스트롬이 정리한 시뮬레이션 가설은, 우리가 초고도 문명이 만든 가상 우주 속 “NPC 같은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고, 이후 과학자·철학자들의 토론 대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 사이에는 “증거”라는 거대한 간극이 있고, 이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영국 포츠머스대 물리학자 멜빈 볍손(Melvin Vopson)은 6년째 “우주를 정보·계산 관점에서 측정 가능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연구해 왔습니다.


질량–에너지–정보 등가 원리와 ‘정보역학 제2법칙’

볍손은 2019년, 정보이론의 창시자 클로드 섀넌과 물리학자 롤프 란다우어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아, 질량–에너지–정보 등가 원리(Mass–Energy–Information Equivalence)라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 정보는 단순한 추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서 아주 작은 질량을 가진다는 주장입니다.
  • 이어서 그는 “정보역학 제2법칙(Second Law of Infodynamics)”이라는 개념도 도입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이 “고립계의 엔트로피(무질서)는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거나 일정하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볍손은 정보 측면에서는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 물리 세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섞이고 어지럽혀지는 방향(엔트로피 증가)
  • 정보 세계: 계산·압축·최적화를 통해 더 정리되고 압축되는 방향(정보 엔트로피 감소)

이 “정보역학 법칙”이 우주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지를 검증하는 것이 그의 최근 연구들의 공통 목표입니다.


COVID-19 바이러스 변이에서 찾은 첫 힌트: 엔트로피가 줄어든다?

볍손은 2022년, 코로나19 팬데믹 때 공개된 SARS-CoV-2 변이 데이터를 분석해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 바이러스가 변이할수록 유전자 서열의 정보 엔트로피가 줄어드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 그는 “만약 우주가 초고도 시뮬레이션이라면, 연산·저장 비용을 줄이기 위한 내장된 최적화·압축 알고리즘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했습니다.
  • 그 관점에서 보면, 바이러스 변이가 복잡도를 줄이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것은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정보량을 최적화해 나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물론 이는 매우 논쟁적인 해석이고, 유전체 변화에는 적응·선택·우연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므로, 단일 데이터셋으로 우주 전체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볍손은 이 사례를 “정보역학 제2법칙이 생물 시스템에도 나타나는지 보려는 첫 시도”로 제시합니다.


새 논문: 중력이 정보 엔트로피를 줄이는 ‘정리 장치’라면?

최근 AIP Advances에 발표한 볍손의 새 논문은, 중력(gravity)을 정보 엔트로피와 연결합니다.

중력과 정보 엔트로피의 관계

  • 어떤 공간 영역에 여러 물체가 흩어져 있으면,
    • 위치·속도·질량 등 각 물체의 정보가 서로 떨어진 상태로 존재해 높은 정보 엔트로피를 가집니다.
  • 시간이 지나 중력이 작용하면, 이 물체들이 서로 끌려 더 가까이 모여 군집을 형성합니다.
  • 볍손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정보 엔트로피가 감소하고, 시스템은 더 높은 ‘정보적 질서’ 상태로 이동합니다.

즉, 중력은 단순히 질량 사이를 끌어당기는 힘이 아니라, “정보 혼돈을 줄이고 계산적으로 다루기 쉬운 상태로 압축하는 알고리즘 같은 역할”을 한다는 가설입니다.

‘엔트로피 중력’과의 연결

볍손은 이 아이디어를, 2011년 네덜란드 이론물리학자 에릭 페를린더(Erik Verlinde)가 제안한 “엔트로피 중력(entropic gravity)”과 연결합니다.

  • 엔트로피 중력 이론은 중력이 근본적인 힘이 아니라, 더 깊은 정보·통계적 과정에서 emergent(발현)되는 현상이라고 봅니다.
  • 볍손은 여기에 자신의 정보역학 제2법칙을 얹어,
    • 중력은 우주가 필요로 하는 계산·저장 자원을 줄이기 위해, 정보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매커니즘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가 맞다면, 중력은 단지 질량 곱에 비례하는 힘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우주에서 CPU·메모리를 아끼기 위한 정리 함수” 같은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게 진짜라면, 우주론·블랙홀·암흑에너지까지 흔들린다?

볍손은 논문에서 이 가설이 암흑에너지, 양자 중력, 블랙홀 열역학 같은 난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 블랙홀 열역학
    • 블랙홀은 정보·엔트로피 문제의 중심에 있는 존재로, 정보가 어디로 가는지(정보 역설)가 큰 이슈입니다.
    • 중력이 정보 엔트로피를 줄이는 역할이라면, 블랙홀 주변에서 정보가 어떻게 압축·정리되는지를 새로운 프레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암흑에너지·우주 팽창
    • 우주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팽창·가속하는지에, 정보량·정보 엔트로피 변화가 관여한다는 관점을 추가로 제시할 여지가 있습니다.

다만, 이 모든 연결은 아직 정성적·개념적 수준이며, 커뮤니티 전체가 인정하는 정량적 예측·검증 단계까지 나아가려면 더 많은 계산·실험적 후보가 필요합니다.


“시뮬레이션 우주”와의 연결, 그리고 저자 본인의 신중함

재미있는 점은, 볍손이 처음부터 시뮬레이션 가설을 공부하려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 그는 원래 축약 물리학(응집물질)과 디지털 데이터 저장을 연구하며, 시게이트에서 R&D 과학자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 이 과정에서 정보·데이터 압축·저장 효율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 “우주 전체도 어떤 의미에서는 초대형 데이터 저장·연산 시스템처럼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사고로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정보역학 법칙을 적용할 새로운 예를 찾다가, 시뮬레이션 가설과 자연스럽게 접점이 생겼다는 설명입니다.

그는 동시에, 자신의 주장들이 아직은 대담한 가설 수준임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 논문 제목에 물음표(?)를 자주 넣고,
  • 결론부에 “시뮬레이션 가설은 여전히 가설일 뿐이며, 이 결과가 결정적 증거라고 볼 수 없다”는 식의 디스클레이머를 명시합니다.
  • “우리는 결과를 공개하고 토론·반박을 허용해야만 진전이 있다”며, 본인의 아이디어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조차 과학 발전의 일부라고 말합니다.